걸크러쉬형 걸그룹 시대에 대한 고찰…자본주의적 관점에서 [K-POP포커스]

기사입력 2020.06.10 오후 09:38



2020년 상반기는 그야말로 대 걸크러쉬 걸그룹의 시대였다.

음원차트 상황만 놓고 보면 다소 갸우뚱하게 여길 독자 분들도 있겠지만, 데뷔와 컴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주 대단한 걸크러쉬의 시대였다.

이전에도 걸크러쉬의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그때와 지금은 큰 차이점이 한 가지 존재한다. 예전엔 좀 특정 소속사(SM, JYP, 큐브 등)에서만 걸크러쉬형 걸그룹들을 내놨다면 지금은 소속사를 불문하고 대부분 걸크러쉬에 힘을 빡 주고 나온다는 것.




(로켓펀치, 이달의 소녀, 체리블렛, 에버글로우 등 주목받는 신인들이 모두 걸크러쉬를 들고 컴백했던 올해 2월)

이러한 경향에 대해 ‘당당한 여성상을 원하는 시대가 됐다’라고 분석하는 글들이 존재한다. 그런 이야기들 역시 타당성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자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경향은 다섯 음절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팬덤과 수출’이다.

걸그룹이 걸크러쉬를 한다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한다. 하나는 팬덤이고, 나머지 하나는 해외반응이다. 팬덤은 음반 판매량으로, 해외반응은 유튜브 조회수로 측정된다. 걸크러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획득할 수 있는 컨셉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는 아이돌 시장이 여성팬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위에 언급한 가치를 증명한 선대 걸그룹이 2009년에 데뷔한 걸크러쉬 트로이카 투애니원, 포미닛, 에프엑스. 냉정하게 보면 현대 걸크러쉬 걸그룹 대부분은 이들이 증명해놓은 공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 시대에 걸크러쉬형 걸그룹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단순하다. 케이팝을 소비하는 해외시장의 규모가 엄청 커졌기 때문이다. 현대의 신인 걸크러쉬 그룹들이 공략하고자 하는 곳이 바로 이쪽. 달리 말하면 이들에게 내수시장은 ‘메인’이 아니다.

사실 걸크러쉬형 그룹들이 해외를 바라보고 만들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내수를 완전히 버리고 가냐-하면 또 그건 아니다. 오히려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 반응을 크게 얻은 걸그룹들 면면을 살펴보면 걸크러쉬 계열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4년에 데뷔한 레드벨벳과 마마무, 2016년에 데뷔한 블랙핑크, 2018년에 데뷔한 (여자)아이들, 2019년에 데뷔한 있지 등이 대표적인 걸크러쉬형 걸그룹인데, 이들 모두 국내 음원차트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둔 팀들이다. 행사, CF 등 걸그룹의 주요수입원 모두에서 앞서면 앞섰지 뒤처지는 성적표를 보여주지 않았다.

같은 시기 청순, 섹시 걸그룹 신인의 경우엔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뉴페이스가 별로 없었다. 섹시 컨셉 걸그룹의 경우엔 메인스트림에서 사실상 멸종됐다고 할 수 있고, 청순 쪽도 2014년~2015년에 나온 그룹들(여자친구, 러블리즈, 오마이걸 등) 이후 영향력 있는 신인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2017년부터 2020년 상반기까지를 기준으로 둔다면, ‘한 팀도 안 나왔다’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2020년 현재, ‘청순 계열 걸그룹 중 차트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있는 팀’하면 언급될 팀이 2011년에 데뷔한 에이핑크라는 점은 많은 걸 시사한다. 에이핑크 역시 ‘1도 없어’ 이후 컨셉이 많이 변한 상태)

섹시 쪽의 경우에는 사실상 2012년 이후 의미 있는 신인이 안 나오고 있다. 지금이 2020년이니까 벌써 약 8년 정도 지난 것. 너무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래 팀들의 데뷔년도를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될 것이다.

시크릿 : 데뷔 2009년 / 섹시 컨셉 대표곡 : ‘사랑은 MOVE’(2011), ‘포이즌’(2012)
레인보우 : 데뷔 2009년 / 섹시 컨셉 대표곡 : ‘A’(2010)
씨스타 : 데뷔 2010년 / 섹시 컨셉 대표곡 : ‘나혼자’(2012)
걸스데이 : 데뷔 2010년 / 섹시 컨셉 대표곡 : ‘기대해’(2013), ‘썸띵’(2014)
EXID : 데뷔 2012년 / 섹시 컨셉 대표곡 : ‘위아래’(2014)
AOA : 데뷔 2012년 / 섹시 컨셉 대표곡 : ‘짧은 치마’(2014)

3세대 걸그룹 시대가 열린 2014년 이후에 데뷔한 걸그룹 중, 이들만큼 성과를 낸 섹시 걸그룹을 떠올릴 수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그나마 언급할만한 팀이 ‘뿜뿜’ 시절 모모랜드인데, ‘뿜뿜’의 메인 컨셉은 복고였으니) ‘大 섹시 걸그룹 시대’였던 2013~2014년에 섹시를 한다는 것은 소위 ‘궁극기’(필살기, 일발역전기 등등)를 쓰는 거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위와 같은 사례를 보면, 걸크러쉬로 몰리는 이유는 더 분명해진다. 그래도 걸크러쉬 쪽은 꾸준히 성공사례를 내고 있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돈이 안 될 것 같은 컨셉에 힘을 쏟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 여기까지 글을 읽은 독자 중엔 ‘그래도 청순이나 섹시나 사실상 무주공산이니까 한번 도전해볼만하지 않냐’라고 반문할 독자도 있을 텐데, 실제로 이 두 분야가 무주공산이냐-는 건 좀 생각해볼 부분이다. 메인 컨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맞지만, ‘팬들의 소비’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가 약간 다르다.





(반응이 꽤 좋았던 ‘내돌의 온도차’ 이달의 소녀 ‘쏘왓’ 편)

간단히 말해 일정 체급 이상 되는 팀들은 다 기본적으로 그런 건(청순 섹시 큐티 등등) 할 줄 안다. ‘원더케이’에서 진행하는 ‘내돌의 온도차’가 그냥 만들어진 콘텐츠가 아니다.


(기량이 뛰어난 팀이 작정하고 컨셉 변화를 도모하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지 보여준 ‘퀸덤’ 오마이걸)

청순이 메인인 팀도 걸크러쉬를 할 줄 알고, 걸크러쉬가 메인인 팀도 때에 따라 귀여워질 줄 아는 시대. 걸그룹을 구분할 때 사용됐던 전통적인 컨셉들은 사실상 ‘기본 스펙’이 됐다. 걸그룹 콘서트 가서 개인 및 유닛 무대 몇 개만 봐도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체감이 된다.

센 컨셉을 메인으로 하는 팀들도 (타이틀곡이 아닌) 수록곡에선 다양한 변화를 주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파이를 빼앗아 온다는 건 녹록치 않은 일. 앞으로도 청순, 섹시를 메인으로 삼으려는 팀들은 성장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하면 '걸크러쉬 컨셉만 밀면 만사가 다 해결되는가'라는 말이 나올텐데, 아쉽게도 그건 또 아니다. 상대적으로 확률이 약간 더 높고, 노릴 수 있는 시장이 아주 클 뿐, 걸크러쉬 쪽도 바늘구멍인 건 마찬가지다.

블랙핑크는 YG가 투애니원 이후 약 7년 만에 내놓은 (그리고 테디가 메인프로듀서인) 여돌 최정예 팀.

(여자)아이들은 ‘오디션이 낳은 괴물’ 전소연이 진두지휘하고 있는 팀. 역시 인재풀 하나는 확실히 믿을만한 큐브 소속 그룹.

있지는 최강의 인재풀을 자랑한다는 JYP의 여돌 연습생풀에서 추리고 추린 정예들로 모아둔 팀.

이들만큼 성공하려면 이들에 견줄만한 인재들로 팀을 꾸려야 하고, 이들의 프로듀서만큼 좋은 프로듀서도 있어야 한다. 전소연처럼 작사, 작곡, 퍼포먼스 기획 다 하는 인재를 뽑은 것이 아니라면.

다만 아이돌 시장 자체가 수출 지향적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여러 기획사와 걸그룹들은 계속 이쪽(걸크러쉬)으로 문을 두드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성공을 하느냐와는 별개로 말이다.

컨셉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전통적인 청순, 섹시가 잘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됐다는 것은 걸그룹 프로듀싱의 난이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는 걸 의미한다. 유력하게 밀어볼 만한 컨셉 두 개가 약해졌거나 없어진 것이니. 세계관, 스토리 등에 공을 들이는 팀들이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걸그룹들이 어떤 컨셉, 어떤 전략을 선보여 이 ‘난이도 높은 시장’에서 살아남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tvX 이정범 기자 leejb@xportsnews.com / 사진 = 울림-FNC-위에화-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멜론-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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